"Sleepless 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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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 : 시간 같은 잡담

"어쨌거나, 세계는 변하고 있다."

이번에도 역시나, 작문을 위한 작문을 하고 말았다.
이렇게 불투명한 이야기는 그냥 개 똥일 뿐인데...;
읽다 보니, 어떻게 고쳐야 할 지 각을 잡을 수가 없다.
이놈은 이렇게 생을 마칠 운명인 걸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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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는 조금도 변하지 않는 것 같다.

바보가 된 듯한 기분이다."

- 다자이 오사무, [고뇌의 연감]


내 앞에 있는 사람들

저마다 저만 안 죽는다는

얼굴들일세

- 바쇼



1.


   I need to watch things die, from a good safe distance

   (나는 뭔가 죽어 가는 것을 지켜봐야 해, 아주 안전한 거리에서)

   Vicariously I live while the whole world dies

   (모든 세상이 죽어가는 동안, 나는 대리 만족하며 살아가)

   You all feel the same so

   (너희들도 똑같이 느끼잖아?)

- Tool, "Vicarious" from [10,000 Days](2006).



  대중은 이야기에 흥분한다. 정확하게 그 중에서도, 비극의 서사 구조를 지닌 이야기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당장 주변만 둘러 보아도 알 수 있다. 매스컴이 주목하는 것은 촬영한 대상인가, 아니면 그를 둘러싼 ‘이야기’ 인가? 뉴스를 보고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고 느껴진다면, 그저 TV 드라마만 지켜 봐도 알 수 있다.


  드라마에서도 전문 직종들이 등장하는 것이 요즘의 추세라지만, 인물들은 여전히 스테레오타입을 벗어나지 못한다. 드라마의 만듬새와 주요 배우들의 이름값 혹은 연기를 제외한다면 그저 ‘어떤 인물이 등장하여 어떤 비극적인 상황을 겪는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시청자들에게 그 비극에 관한 공감을 얻는가’ 하는 문제가 여전히 드라마의 성패를 결정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가치관은 점점 다르게 바뀌어 가지만, 역시나 풍속 극화는 시대의 척도인 것이다. 대중들과는 동떨어진 재벌 이야기나 신데렐라 이야기를 다루는 것을 두고 ‘현실감이 없다’ 라고 비판하는 이들도 많지만 적어도 그것은 우리 사회가 ‘선망하는 것’을 여과 없이, 그리고 꽤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일면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 들에는 전제가 하나씩 따라 다닌다. 이야기하기 전에, 한 가지 질문을 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대중들로부터 폭넓은 인기를 구가했던 극화 중에, 결말까지 비극인 작품은 얼마나 되는가? 몇몇 작품들이 떠오르긴 하지만, 그것은 극히 일부일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통해, 결국 본인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요컨대 대중은 비극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지만, 깊이 공감하다가도 그것이 자신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순간은 즐기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화제의 분야를 조금 바꿔서 이야기해 보자. 멀지 않은 과거, 대학가에서도 사회를 휩쓸고 있는 민주화 운동의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많은 사람들은 언론을 통해 보도되는 당시 정부의 모습과 행동에 분노와 개탄을 쏟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자기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것에 관해서는 강한 거부감을 품었다.


  “...(전략)...화염병 깨지면서 솟는 푸른 불길, 매캐한 최루탄 연기. 입과 코를 막고 열나게 뛰었다가 문득 눈을 들어보니 닭장차 앞이었지. 기억나니? 훈방 조치 받고 형들한테 술을 얻어먹었지.  졸업한 이후에도 끝까지 싸우자 했지. 그런데, 군대갔다온 뒤 난 널 못봤어. 도서관에 있었니? 삐삐 다 꺼놓고? 넌 내가 어찌 살 지 걱정해서는 안돼. 새로운 세상을 위해 누군가 희생해야만 한다고 그렇게 말했잖니. 그런데, 그 사람이 네가 아는 사람인건 싫은거니?...(후략)...”

UMC, "91학번“ from [XSLP](2005).


  운율을 지닌 랩이 아니라 말을 하듯 가볍게 써 내려간 위의 가사는, 그 본질은 약간 다르지만 내가 대학에 입학한 후의 심정과 비슷했다. 갓 입학한 새내기들이 무엇을 제대로 알았으랴만, 그래도 주위의 친구들은 등록금이 비싸네 마네 하는 불만들을 제법 심심찮게 토해냈다. 물론 내 생각도 그랬고, 등록금 투쟁이나 여타 학교에 대한 건의를 말하는 자리에 열심히 쫓아 다녔다. 간혹 강의와 중첩되는 시간일 경우에는 강의도 나가지 않았다. 그것이 강의에 한 번 더 출석하는 것보다 가치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주변 친구들의 반응은, 당시 나에게는 의외였다. 공부도 좀 해야 하지 않겠느냐ㅡ, 혹은 성적 관리 같은 건 안 하느냐ㅡ 라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물론 당시에는 나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한 채 쫓아다녔으므로 적당한 반론이 불가능했지만, 그냥 “불만이 있으면 확실히 얘기하는 것이 맞는 거 아닌가” 정도로 얼버무렸던 기억이 있다.


  대학 생활과 별개로 알고 지내게 된 분들에게 들은 당시의 상황도 비슷했다. 날마다 학교 앞에서 폭력을 동반한 충돌과 추격의 현장 속에서, 관심을 갖지 않았던 많은 학생들은 서로 묻곤 했다고 한다. “근데 쟤네는 저 짓을 왜 한다니?”


  물론 이것이 보편적인 대화는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정국에 지대한 관심과 상응하는 양의 불만을 토해냈던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참여하지 않는 이유를 물으면 ‘폭력과 테러가 역사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끈 적은 없다’ 같은 논리의 뒤에 숨는 사람이 많았고, 싸움의 현장은 점점 소외되었다. 고문 치사 등의 큰 계기들이 밝혀지지 않은 채로 있었다면, 과연 현재의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물론, 역사에 가정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무용한 질문일 테지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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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Chemical Brothers, “Star Guitar" M/V by Michel Gondry, 2002



  프랑스의 영화 감독인 미셸 공드리가 감독한, 일렉트로니카 듀오 케미컬 브라더스의 뮤직 비디오 클립 중 몇 장면과 메이킹 필름의 일부이다. 이것만 봐서는 아무 의미 없는 풍경 사진 혹은 잡다한 사물의 나열로만 보일 것이다. 이 뮤직 비디오가 처음 방영되었을 때, 사람들의 반응 역시 비슷했다. 기차를 타고 가면서 찍은 풍경을 담은, 아무 의미 없는 4분짜리 비디오였기 때문이었는데, 어이없다는 이야기를 궁시렁대며 비디오를 다시 보던 사람들은,  곧이어 오싹한 사실을 알게 된다. 텍스트이기 때문에 비디오를 링크할 수 없으므로 문장으로만 표현하는 점이 아쉽다.


  어쨌거나 케미컬 브라더스와 미셸 공드리의 작품이니 뭔가 의미가 있겠지ㅡ 하며 지나가는 풍경의 영상을 다시 시청하던 사람들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하고 다시 반복해서 재생 버튼을 누르게 되었다. 분명 아무런 문제 없는, 평온한 공장 주변 전원의 태평스런 모습일 뿐인데 어째서인지 위화감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그리고 몇 번에 걸쳐 영상을 재생한 끝에 알아내게 되는 사실은, “모든 사물이 리듬과 멜로디에 맞춰서 흐르고 있다” 라는 것이다. 아무 가공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던 풍경 비디오는, 각종 그래픽과 모션 캡쳐로 만들어진 세계였던 것이다.


  너무 거창한 해석을 덧붙이는 것 같지만, 이 짧은 영상물에서 무엇을 얻는가는 각자의 몫이다. 내가 이 영상을 보고 느끼게 된 것은, 자본주의의 근대 이후로 ‘도시’ 라는 존재가 얼마나 치밀하게 계획되어 사람들을 그 속으로 밀어넣는가 하는 점이었다.


  ‘도시 연구’ 자체가 활발히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학문에 비하여 텍스트 자체가 많지 않지만 근현대, 나아가 앞으로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흐름을 연구함에 있어 가장 각광받는 것이 도시 연구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자본이라는 수단을 받아들이고 물류의 흐름을 공유하게 된 근대 이후, 각국은 서로 끊임없이 교류하며 경쟁해야 했다. 그 속도는 점차 빠르게 진행되었으며, 그러다 보니 때로는 교류 자체보다는 속도를 소비하고 나누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그 ‘속도’ 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을 현재 우리는 보통 ‘낙후’ 혹은 ‘후진’ 이라 정의한다. 그리고 현재 우리는, 세계 시민cosmopolitan이라는 단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마치 속도에 동의하며 소비의 흐름에 맞춰 가고 있다는 것의 증거로 내보이듯이.


  그 중심에는 ‘도시’ 가 있다. 많은 사람들의 환망의 대상이 되는 영/미/유럽권의 특정 도시들이 가지는 외적 이미지만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며, 유난히 서울과 그 주변에 집중해 있는 근현대의 한국은 우리 주변의 살아 있는 예시라 할 것이다.


  건축 회사의 모델 하우스 같은 곳에서 앞으로의 건축 계획을 조감도 시점으로 구현해놓은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히 떠오르는 단어는 ‘모형’ 이다. 물론 그 물건은 모형임에 틀림없지만, 그 단어의 어감은 큐브릭의 [샤이닝The Shining] 에서 모형 정원을 보며 음흉하게 웃는 잭 니콜슨을 보는 것 같은 기분과 같은 것이다. 발터 벤야민의 표현을 빌자면, ‘한 눈에 들어오도록 원근법적으로 배치’ 했다는 것이다. 근대 파리의 모습을 재구성할 때와 비교해 보자면, 기술적으로는 훨씬 더 발전했다고 하겠다.


  하지만 그 본질은 근대의 모습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건물을 높이 올리는 것, 거칠게 비약하자면 ’보이지 않고 보기 위한 감시자적 시선‘1)을 구축하는 것은 과거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 하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가? 점점 높아진다는 착각을 일으키기 쉬운 고층의 건물 속에서, 시간이 되면 그 곳에서 내려와 계획적으로 ’단순화된, 그리고 균질화된‘2) 도시를 건너 가야 한다는 사실을 잠시 잊을 뿐이다. 예나 지금이나, 시스템을 지배하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높이나 넓이 같은 가치에 집착하지 않는다. 다만 그 물리적인 가치를 만들어내고, 그 소중함을 역설할 뿐이다. 도시는 하나의 이미지일 뿐이니까.


  “파시즘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명확한 대답은 없다. 적어도 나는 잘 모른다. 20세기에 탄생한 독자적인, 반지성적이며 본능적인 정치 체계라고 풀이해 봤자 결국 그것은 아무 것도 뜻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굳이 말하자면 파시즘이란 바로 ‘통일되어 있는 것’ 이라는 의미이다. 애당초 파시즘의 프랑스어 어원인 ‘faisceau' 는 ’몇 개의 총부리를 다발로 묶어서 세우는 일‘ 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즉 갖다 붙이자면 이 ’수박 씨의 줄‘ 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생리적으로나 본능적으로나 저항감을 느끼게 하는 이 섬뜩함은 파시즘이 갖는 공포와 닮지 않았을까? 생각해, 생각해...” 3)



  공드리의 뮤직 비디오를 본 이후, 그저 버스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다리의 난간을 볼 때마저도 순간 오싹할 때가 있다. 청계천변에 동 간격으로 박힌 가로등과 가로수, 같은 규격으로 디자인된 아파트, 심지어 방에 들어와서는 나란히 배열된 여든 여덟 개의 건반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가지런하게 통일된 것들이 나열된 광경이 보기 좋은 것이라고 어릴 때부터 배워 왔지만, 왠지 그 안에 담긴 것들조차 진정성이 없을 것이라고 오해하게 되는 것은 어째서일까? 물론 이것은 단순히 사는 집이라거나 일하는 건물 같은 외양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어릴 때부터 받는 교육, 정규 교육 과정을 거치며 직/간접적으로 배우는 것들, 그 이후의 취업 등 여러 가지의 방면에서 생각해 볼 만한 일이다.


 




3.


  그리고 이제 마지막으로, 2008년 현재의 상황에 관해서 생각해 본다. 90년대를 거치면서 젊은이들, 혹은 젋었던 이들은 누구보다도 ‘개성’ 이라는 가치에 관해서 많은 언급을 했던 세대일 것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어떤가?


  에드거 앨런 포나 발터 벤야민의 언급처럼, 대중의 존재는 항상 휩쓸리는 역할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촘스키 같은 학자들에 의해 ‘행렬 중의 황소’ 같은 과격한 표현이 나오기도 했다. 젊은 이들의 경우에도 이것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과거 신문 등의 매체가 했던 역할은 현재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미디어도 고스란히 이어 받았다. ‘수용자도 표현 가능한 쌍방향의Interactive 미디어’ 라는 기능과 특성은 엄연히 존재했지만, 현재까지로 미루어 보았을 때는 희망적인 허울일 뿐이라고 여겨진다.


현대 사회를 계급으로 가르는 것은 무리가 있으며 대체로 평등한 사회가 되었으며 위/아래를 막론하고 표현 상의 자유가 주어졌다고 보는 시선도 있으나, 과거에 비해 영속적인 성격만 엷어졌을 뿐 계층이라는 것은 존재한다고 보여진다. 한마디로 착각을 하는 사람들이 늘었다는 이야기다. 개인 주식 투자나 펀드가 이렇게 열풍을 일으켰던 것도, 누구나 '자신도 할 수 있다' 라는 생각을 갖는 것에 기반한 일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떤가?


한 일간지의 설문 조사에 따르면, 현재 2~30대들은 “경제가 어려워졌고 앞으로도 더 어려워질 것이다” 라는 점에는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도 어려워질 것이다” 라는 명제에는 동의하지 않고 있다. 이 무슨, 모순된 생각인가.


  지성인이라고 불리던 신분인, 대학생들은 어떤가?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몇 년 전부터 대학생들은 과제가 생기면 컴퓨터 앞에 앉아 ‘사색’ 이 아니라 ‘검색’ 을 한다. 자신의 ‘의견’을 길게 서술하는 것은 애초부터 관심 있는 이들이 아니면 학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는 변해 가는 미디어의 영향으로 인해 조금 더 낮은 연령의 학생들에게까지 퍼져 나간다. 매력적인 말이나 문구는 충분히 이해되지도 못한 채 암기되며, 대중을 선동하려는 이들은 ‘알기 쉽지만 이해하기는 어려운’ 말로 젊은 사람들을 현혹한다.


  현재 젊은이들에게 있어 존경받을 만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은, ‘좀 더 새롭고 신뢰할 만한 정보를 얻는 사람’ 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환경 속에서 자본주의의 단계는 점차 발달하여 이러한 ‘정보’ 와 ‘경험’ 이 일정한 경제적 가치를 가지고 거래되는 것이 현대라는 이름의 시간이다. 단 한 사람의 미국인과도 말을 섞어 본 적 없는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본 텍스트와 영화 몇 편을 근거로 반미를 외치며, 조선/중앙/동아일보를 펼쳐 본 적도 없는 젊은이들이 기사의 단편을 오려낸 텍스트를 이야기하며 ‘수구 꼴통’ 운운하는 모습이, 현재 우리의 조감도인 것이다.


프랑스 혁명 전후의 사정을 들어 칼 맑스는 '부르주아 군주제에서 부르주아 공화제로 이행되었다' 라고 비판한 바가 있었는데, 이것은 현대에 이르기까지도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이다. 노동자들은 여전히 과도한 일을 부여받고 있으며, 사용자들은 이를 부추기며 한편으로는 '성실히 일하지 않는 사람' 에 대한 성토의 풍조를 만들어 나간다. 게다가 현대에는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많아진 것처럼 보이' 기 때문에 더욱 혼란한 상황이다. 직장에서는 성실히 일할 것을 강요받으며, 월급을 쪼개어 가며 투자하는 주식이나 펀드에서는 좀 괜찮은 사업을 진행하는 회사가 있다고 하면 그쪽으로 몰려 간다. 그러한 분위기를 조장하는 상부에도 문제는 존재하지만, 그것에 의심 없이 이끌리는 사람들 역시나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여기까지만 이야기한다면 그저 대중 혐오로 끝나는 이야기일 것이고, 근대 이후 각 지식인들의 방에서 이루어졌던 수많은 고뇌와 비슷하면서도 그에 비해 질낮은 이야기가 될 뿐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짧은 글솜씨에도 불구하고, ‘그 다음’ 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현재, 한 달이 넘도록 촛불 시위가 전국을 뒤덮는 이슈가 되고 있다. 시작했을 때부터 약 2주 정도 시위 현장에 출근 도장을 찍으며 느낀 점은 다음과 같다. 사람들을 우중으로 치부하고 미리 희망을 잃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라는 점이다. 쇠고기 수입에 관해서 반발하는 것으로 시작한 모임이었고 각 계층의 사람들이 골고루 모인, 말 그대로 '군중' 이다. 어떤 통일된 힘이나 이념에 기반한 조직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 집회는 더욱 더 기념할 만한 일인 것이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더욱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더 많이 보이지만, 배후 같은 것은 없기 때문에 더욱 더 큰 힘을 지닐 수 있는 것이다.


   어떠한 현상이 벌어지는 것을 보고, 한 개인이 그 안에서 어떠한 가치관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주어지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 혼란한 와중에서 어떠한 것을 선택하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처럼 보여 순탄해 보이지만 실은 빈곤한 선택지를 지니고 있었던’ 상황보다는, 약간의 혼란을 겪더라도 ‘자신의 의견’ 을 갖게 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시위를 찬성하든지 반대하든지, 그냥 무작정 하는 선택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생각하는 의견을 바탕으로 하면 존중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가장 바람직한 결과는 시위를 계속하며 뜻을 관철시키는 것에 있는 것에 있기도 하지만, 이를 계기로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버릇’을 자신 안에 들이는 것도 그에 못지 않게 중대한 결실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사람은 많이 줄었지만 다들 밤잠을 설쳐 가며 이렇게 모이는 이유는 다양하며, 각 개인마다 시위에서 얻어 가는 것도 다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계기로 하여 사람들이 상부 구조의 지시에 맥없이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해 한 번이나마 의문을 가질 수 있는 습관을 갖게 된다면, 과거 어떤 강경한 태도로도 얻을 수 없었던 결과가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예측해 본다.


  철부지의 이상론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글의 제목에 붙여 놓은 밥 딜런의 노래 제목ㅡ'Times Are a-Changin'ㅡ처럼 이 세계는 ‘어쨌거나’ 바뀌어 나가고 있다. 그 변화를 지켜 보며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는 것은 어떻게 보면 조직되지 않은 개인의 생각이 모이고 모여서 이루어지고, 우리는 그 기나긴 훈련의 과정을 거치고 있는 중이라고 믿고 싶다. ‘혁명은 절대 방송되지 않는 것’ 이니까. 4)



 

ⓒ BEATWEI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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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중에서. '판옵티콘' 의 개념을 설명할 때 쓰인 말이다.
2) 가라타니 고진,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중 ‘근대인’의 특성을 규정하면서.
3) 이사카 코타로, [마왕(魔王)](2006), p53.
4) Gil Scott-Heron, "Revolution Will Not Be Televised" (1970).
    흑인 음악의 정신적인 지주라고 일컬어지는 질 스캇 헤론의 노래.
    랩의 시초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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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23 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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